닐 드럭만이 유저에게 불쾌감을 유발한 방법 <라스트 오브 어스 Part2> [02]

2021. 1. 4. 00:02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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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드럭만은 유저들의 권력을 어떻게 앗아갔는가?>의 후속 글입니다.

닐 드럭만의 의도

  닐 드럭만(Neil Druckmann)은 전작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자신이 의도한 결말의 의미가 유저들의 해석과 얼마나 어긋난 형태였는지 <라스트 오브 어스 Part2>에서 보여준다. 비록 그 결말에 비극의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엘이 고문 살해당하고 엘리의 친구와 지인이 불구나 사망에 이르고 엘리 본인도 손가락이 잘리는 것과 같은 극단으로 향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닐 드럭만은 자신이 허용하지 않은 형태로 해석자들이 결말을 즐긴 것과 반대로 어쩌면 그 반대보다 더 가혹한 방식으로 해석자들을 응징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죄를 해석자의 해석을 부정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제 해석자들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 그 자체도 해체한다. 다시 말해 닐 드럭만은 유저들이 Part2에서 불쾌한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더 노골적으로는 이 게임을 싫어하기를 바란다. 

Druckmann understands from his hours of watching playtesters that not everyone appreciates that. In fact, he says, some players hate the game. And he knows it will be the same for certain fans of The Last of Us out in the wild. “Some of them are not going to like this game, and not like where it goes, and not like what it says or the fate of characters that they love,” Druckmann notes. But he believes developers like him must learn to tolerate more discomfort: “I'd rather have people passionately hate it than just be like, ‘Yeah, it was OK.’ ”
드럭만은 그가 게임 테스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진가를 알아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실, 그는 일부 플레이어들은 그 게임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외부(아직 플레이하지 않은)의 Last of Us의 일부 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게임이 어디로 가는지, 게임이 말하는 것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인물의 운명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드럭만은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개발자들이 더 많은 불편함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그래, 괜찮았어'처럼 되기보다는 열정적으로 그것을 싫어하게 하고 싶어."
-WIRED interview-

  어떤 사람들은 닐 드럭만의 저 말을 평범한 게임을 만드는 대신 특별한 게임을 만들 거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는 이상한 해석이다. 전작처럼 누구나 명작으로 생각하는 게임을 만들 수는 없었나? 평범하게 좋은 것의 반대가 열렬한 싫어함일 수 있는가?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고 해서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분노하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유저가 싫어하게 하고 싶다는 저 말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도 이미 유저들의 해석을 완강하게 부정했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테스터나 일부 개발자 들의 반발로 닐 드럭만은 유저들이 싫어할 만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체 맥락과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방점은 "hate"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백번 양보해서 좋게 해석하더라도 그는 유저들이 싫어할만한 게임을 만들었지만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다"라고 해석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닐 드럭만이 어떻게 Part2를 불쾌하도록 만들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우선 사람들이 전작을, 일반적인 액션 게임을 어떤 방식으로 즐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수동적인 매체와는 다르게 캐릭터를 직접 플레이해야 하는 능동적인 매체로 경험한다. 그래서 게임 내의 캐릭터에 자신을 더 쉽게 투영할 수 있고 그 캐릭터가 겪는 어려움을 직접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으로 체험한다. 심리적 감정적 설득력을 갖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전작에서 게임 속 통제된 위협에 불과한 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NPC들은 액션을 위한 액스트라에 불과했다. 생존이 최우선이 된 아포칼립스 배경에서 죄책감 따위는 없으며 그래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대의보다는 사랑하는 엘리를 잃을 수 없다는 조엘의 결정에도 큰 어려움 없이 공감한다. 

고통을 주는 방법 01 - 하기 싫은 일 시키기

  라오어는 플레이어가 하기 싫은 행위들을 알고 일부러 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플레이어인 자신을 악당으로 만드는 연출과 함께 스토리의 진행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주인공 애비를 조작하여 플레이어와의 감정적 유대가 있는 엘리를 살해해야 하는 미션이 강제된다. 한편 극의 마지막에서는 엘리가 복수를 성공하기 직전까지 가는데 플레이어의 감정이 극으로 이른 순간에 복수의 대상인 애비를 살려줌으로써 스스로 복수를 포기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게임은 엘리와 조엘의 유대를 제대로 끊지 않은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어 저항감을 만들어 낸다. 엔딩 크레딧이 뜰 때까지 유저가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일직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단일 엔딩으로 게임이 마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그 감정을 결국 해소하지 못한 채 게임을 마치게 된다. 

고통을 주는 방법 02 - 죄책감 유발하기

당신은 방금 누군가의 동료를 죽였습니다.

  전작에서의 조엘과 엘리에게는 죄책감에 대한 연출이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엘리는 적극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배워 조엘의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엘리의 죄책감은 극의 마지막에서 대사로 암시될 뿐이다. 그러나 Part2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유저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장치들을 마련해 놓았다. 이제 적 NPC들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 동료의 죽음에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지른다. 플레이어를 놀리기 위한 문구인 "누군가의 아버지였습니다." 또는 "누군가의 자식이었습니다."와 같은 밈을 잔인한 방법으로 구현해 내었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다음을 각인시킨다. "네가 한 행위는 살인이다." 

  이런 심리적 트릭은 영화 <양들의 침묵>(1991)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납치범을 설득하기 위해서 납치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의 과거 사진을 TV에 방영한다.  '이름 부여'는 범죄자에게 양심을 가책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소개된다. 킬 무브도 다양하며 묘사와 숨 넘어가는 소리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면 저런 소리가 나겠구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플레이 과정에서 죽였던 적의 개들 역시 애비를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귀엽고 충성스럽게 등장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자신이 학살극을 벌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만든다. 모든 것은 단순히 디테일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 플레이어를 불쾌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다.  

복수 대상을 고문하는 엘리(위), 임산부를 죽이고 고통스러워 하는 엘리(아래)

  이런 간접적인 장치들 뿐 아니라 플레이어는 자신을 악당으로 경험해야 한다. 복수의 대상 중 한 명을 고문 살인하는 장면에서 컷씬으로 처리해도 될 장면을 플레이어가 직접 눌러야 하는 버튼 액션과 함께 빨간 화면으로 연출하였다. 저항할 수 없는 누군가를 고문하는 모습에서 굳이 엘리의 정면에 카메라를 위치시킨 것은 플레이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다. 자신의 플레이가 얼마나 추악한지 비추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 곳곳에 위치한 죄책감 유발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경험과 연결된다.  

      “We can make you experience this thirst for revenge. This thirst for retribution and having. you actually, like, commit the acts of finding it and then showing you the other side to make you regret it. To make you feel dirty for everything you’ve done in the game, making you realise ‘I’m actually the villain of the story.”
우리는 플레이어가 복수에 대한 갈증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실제로 이를 추구하는 행동을 저지르고 나서는 여러분이 후회하도록 만들기 위해 반대편의 입장을 보여줄 겁니다. 당신이 게임에서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더럽게(불쾌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나(플레이어)'는 실제로 이야기의 악당'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 것입니다.”
-GQ interview-

고통을 주는 방법 03 - PTSD를 경험하도록 만들기

  캐릭터들이 겪는 죄책감은 PTSD로 연결된다. PTSD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 경험으로 인한 감정 기억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고통받는 정신질환이다. 우리들에게는 군인들이 전쟁 후에 겪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닐 드럭만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플레이어가 느끼길 바랬고 닐 드럭만과 공동 각본을 작업한 Halley Gross도 스스로 PTSD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유저들이 PTSD를 경험하길 바란다. "충격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 조차 정서적 외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라는 이유를 댔지만 이를 다시 해석하면 우리들에게 정서적 외상을 주고자 하는 목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구이다. 게임에서는 패닉의 경험을 다양하게 묘사한다. 엘리는 살인 후에 죄책감으로 손을 떨거나 이명과 함께 주변의 정보들이 멀어지는 현상을 겪는다. 패닉의 장면과 동반되는 불쾌한 음악은 덤이다. 

To explore how even the most resilient of people cope with mental and emotional trauma. For Gross, having had PTSD twice, she sees it as her “responsibility as a writer” to depict this subject matter in her work for men and women to relate to. It’s something perhaps most important now more than ever. 
가장 회복력이 뛰어난 사람들조차 정신적, 정서적 외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탐구하기 위해서. 그로스는 두 번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면서 이 문제를 남녀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에서 묘사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책임"이라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다. 
-GQ interview-

  PTSD의 경험을 명목으로 유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었지만 무엇보다도 플레이어에게 가혹한 경험은 조엘이 골프채에 맞아 죽는 장면이다. 죽음도 그렇지만 묘사의 잔혹성과 시체 위에 침을 뱉는 장면은 전작을 플레이한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당 장면을 총 세 번 다른 각도에서 플레이어에게 반복적으로 경험시킨다는 점이다. 닐 드럭만은 비극적 사건으로 엘리와 조엘에 공감하는 플레이어를 조엘에 떼어 놓고 싶어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의 플레이어에게는 충격적인 경험만 남고 전작에서의 조엘과 엘리와의 유대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조엘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스트리머들

무엇을 위해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닐 드럭만은 전작에서 유저들이 즐겁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불쾌하도록 만들었다. (1) 유저들이 혐오감을 느낄만한 일 혹은 거부감을 느낄 만한 행위를 선택지 없이 강제로 시켰고 (2) 액션 게임에서 전투를 즐거움이 아니라 죄책감을 심어주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3) 그 죄책감을 이용해 유저들이 심리적 외상을 입는 경험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앞선 글 <닐 드럭만은 유저들의 권력을 어떻게 앗아갔는가?>에서 설명했듯이 유저들이 만들어 놓은 전작의 해석 중 일부를 철저히 부수어 놓았다. 이 같은 이유로 왜 전문 리뷰어들이 이 게임에 만점을 주었는지 나름의 짐작을 해볼 수 있다. <The Last of Us Part 2>는 해석자들의 권력을 다시 작가에게 되찾아 옴으로써 권력을 빼앗은 하나의 사건이다. 작가가 대중 작품의 해석에 대한 권한이 있다는 인식 다시 말해 해석의 독점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런 작품에 만점을 주는 것은 자기 효능감에 점수를 주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굳이 닐 드럭만의 발매 전 인터뷰를 읽어 보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위의 노골적인 요소들을 눈치채고 플레이를 중지하거나 게임에 대해 혹평한다. 사람들이 자주 "교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혹평하는 것은 위와 같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을 즐겁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1) 불쾌감을 유도하는 의도적인 장치들을 눈치 못 챘거나 (2) 불쾌감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거나 (3) 닐 드럭만의 의도를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주는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1) 번이나 (2) 번의 경우라고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3)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고통을 무조건 피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고통에 의미가 주어질 경우 고통에 지독할 정도로 탐닉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혐오나 자해는 그 극단적인 형태이다. 작품의 소비자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려는 작품은 특히 액션 게임에서는 최초의 일이다. 다른 매체에서 우리는 고통을 의도적으로 유도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영화 <남영동 1987>이다.조엘 머리는 골프채로 내려치는 것을 플레이어에게 다른 각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영화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목표로 고문 장면을 긴 시간 동안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도 이 영화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오히려 그 경험을 자처했다. 그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큰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게임을 혹평한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할 적합한 이유를 이 게임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반면 무엇이 됐든 간에 이 게임을 즐긴 사람들은 닐 드럭만의 무례함을 견딜만한 이유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희는 한시적이다. 닐 드럭만은 작품을 내어 놓고 다시 무덤에 누웠지만 다시 부활할 것을 예고하였다.

  Whatever we say here ultimately doesn’t matter. Everything you need to understand the story is in the game, and whatever players take from it… their interpretation is right. At least until if we ever make another game and then we can argue about it then.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든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게임 안에 있고, 플레이어들이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취하든 간에 그들의 해석이 옳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다른 게임을 만들 때까지는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습니다.
-Indiewire interview-


참고자료
Sam White, "The Last of Us Part II: how Naughty Dog made a classic amidst catastrophe." GQ. June 9, 2020.
David Ehrlich, "Neil Druckmann and Halley Gross Open Up About the Biggest Twists of ‘The Last of Us Part II’." IndieWire. Jun 22, 2020.
DARRYN KING, "The Last of Us Part II and Its Crisis-Strewn Path to Release." WIRED. Jun 10, 2020
목차
<닐 드럭만은 유저들의 권력을 어떻게 앗아갔는가?> [01]
<닐 드럭만이 유저에게 불쾌감을 유발한 방법>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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