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으로 소비하기에는 아까운 사이버펑크 [01]

2020. 12. 22. 21:45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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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으로 소비하기에는 아까운 사이버펑크 [02]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은 예술작품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되었죠. 그래서 일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극적 긴장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작가는 우리 삶의 극단적인 면을 부각하기도 합니다. 현실보다 더 지독한 배신과 고통! 그리고 뉴스에서나 볼법한 범죄! 사람들의 비판에도 막장 드라마의 공급이 끊이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카오스 속에서의 인간 군상은 더 선명하게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면 인간을 전혀 새로운 무대장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사이버 펑크(Cyberpunk) 등 장르 고유의 무대장치는 일상 속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그중에서도 사이버펑크는 이 장르가 사용하는 고유의 무대 장치 때문에 특별합니다. 

사이버 펑크란? 

컴퓨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과 반체제적인 대중문화의 결합, 나아가서는 기계와 인간의 대등한 융합을 시도하는 데서 비롯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흐름 ...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이다.
고려한국어대사전.

  SF 하위 장르로서의 사이버펑크는 컴퓨터가 일반인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성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의 운영체제 UI는 직관적인 이미지로 구현되어 컴퓨터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금방 사용할 수 있지만 80년대의 컴퓨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컴퓨터는 각종 명령어를 외우고 입력해야 구동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삭막한 조건이었죠. 그러나 SF 창작자들은 인간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3차원 공간 속에 직접 접속하는 한편 현실에서는 생명공학의 발달로 강화 임플란트를 착용한 강화 인간의 등장을 상상했습니다. 이를 기본으로 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사이버펑크 장르의 일반적인 소재와 설정들은 대부분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의 소설 <뉴로맨서>(1984)에서 집대성됩니다. 이와 더불어 시각적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트론>(1982)입니다. 40대 이상이 아니라면 대부분 세대에서 비교적 알려져 있는 최근 작품은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90년대의 두 작품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 <매트릭스>(1999)입니다.

<블래이드 러너 中>
<사이버펑크 2077>

  장르로서 사이버 펑크가 특별한 이유는 인간 조건을 극적으로 바꾼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주어진 조건은 신체성에 기인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동물보다 월등하게 떨어지는 지각 능력을 가지며 종국에는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에서는 위의 모든 조건이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서 희미해 지거나 사라집니다. 현실과 동일한 감각을 지원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도입은 인간이 지각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하고 기계와 융합한 인간은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버펑크의 배경은 익숙한 일상의 무대장치보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을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다음의 사고 실험실에서는 고전적 자아상과 세계상이 효과적으로 해체됩니다. 

사고 실험실 1: <매트릭스> 

  첫 번째 사고 실험실은 영화 <매트릭스>입니다. 이 영화는 마치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사고 실험실과 동일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작중 인류는 기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지위가 추락하게 되는데 이들을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마음의 감옥이 바로 매트릭스입니다. 작중 주인공과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이버 스페이스(=매트릭스)에 접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매트릭스를 현실로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는 플라톤 식으로 설명하자면 실제 세계의 그림자이며 데카르트 식으로 설명하면 '나를 속이는 존재'가 보여주는 거짓입니다. 

  영화의 주인공(Neo)은 매트릭스 밖에서 기계에 대항하는 인간 중 한 명인 모피어스에 의해 매트릭스에서 탈출해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에게 모피어스는 말합니다. 

"실제가 무엇이지? 어떻게 실제를 정의할 수 있지? 만약 그것이 네가 느끼고 보고 맛본 것을 의미한다면 그건 너의 뇌에서 해석한 전기적 신호에 불과해"

  매트릭스는 기본적으로 가상현실인 탓에 그것을 알고 있는 외부인들은 이론적으로 매트릭스 안에서 신()적인 힘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트릭스가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 조차 매트릭스의 물리법칙을 모두 깨지는 못합니다. <매트릭스> 1편의 내용은 네오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거짓임을 깨닫고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되는 과정입니다.

  물론 네오 이전에 그 존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선배들도 있습니다. 선배 격인 동자승은 숟가락을 염력으로 휘는 모습을 네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숟가락을 건네며 주인공에게 조언합니다. 

  "스푼을 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만을 인식하도록 하세요. 스푼이 없다는 사실이요. 그러면 숟가락이 아닌 나 자신이 휘는 거죠."

  비록 동자승의 조언은 매트릭스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지만 그의 통찰은 자연스럽게 다음의 의문을 들게 합니다. 매트릭스의 현실이 단순한 전기 자극에 대한 해석이라면 매트릭스 밖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 역시 신체라는 기계가 받아들인 신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암묵적으로 매트릭스 밖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실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영화가 제시한 철학적 질문에 충분히 천착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대중영화로서 그와 같은 엄밀함을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는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상정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면 구태어 현실에 대한 질문을 추가적으로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상 모피어스와 동자승은 매트릭스를 빙자하여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질문해 본 적이 있냐고 말이죠. 인간은 육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감각기관으로 걸러서 진실을 한번 왜곡하고 그 지각 전에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지각 정보를 한번 더 왜곡합니다. 매트릭스의 숟가락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바라보는 숟가락도 우리 마음속에 비친 숟가락입니다. '나'는 세계와 관계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세계'(비유하자면 숟가락이 있는 것으로)를 가정하여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나를 제한하는 행위입니다. 마치 매트릭스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인류처럼요. 반대로 '숟가락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매트릭스에서 신적인 존재가 된 네오의 모습은 인지의 변화로 우리가 누릴 자유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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