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파괴와 극복 <사이코지만 괜찮아>

2021. 1. 19. 14:29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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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9/10


드라마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

  인간은 사회 통념이나 도덕과 같은 관념들을 따르기 때문에 과도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스스로 고통받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니체나 카뮈가 만들어 놓은 도덕에서 벗어난 가상의 인물을 상상해 보고 그에 맞게 연기해보았다. 이는 확실하지 않은 가치들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과거의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줬던 일, 스스로에게 강요했던 이상으로 그동안 나는 도무지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이제 마음의 평화는 상당 부분 얻을 수 있었지만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나는 여전히 도덕적 가치가 스스로에게 제동을 거는 것을 느꼈다. 사실상의 변화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죄의 개념이 없거나 희박한 사이코패스 성향의 사람의 삶이 궁금했다. 

  이런 이유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는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드라마 tvN에서 2020년 6월 20일 ~ 2020년 8월 9일 사이에 방영되었다. 정신 병동 보호사 문강태(김수현 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유명 동화작가 고문영(서예지 분), 자폐증이 있는 문강태의 형 문상태(오정세 분)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제목과 더불어 등장인물 고문영(서예지 분)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꾸밈없이 추구하는 모습에서 내가 보고싶은 인간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뒤늦게 시청하였다. 이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어그러졌는데 드라마의 초점이 반사회적 성격 문제가 있는 고문영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문강태의 성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좌측 부터, 문강태(김수현 분), 고문영(서예지 분), 문상태(오정세 분)

진짜 사이코는 누구인가?

  앞에서 밝힌 시청 동기부터 시작해서 드라마의 제목까지 처음에는 고문영의 기행에 눈길이 갈수밖에 없었다. 작품 초반부터 동화작가인 고문영은 어린 팬의 작품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설을 쏟아내 울린다. 그녀는 날붙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식당의 나이프나 회사 내 직원의 문구용품도 그녀의 눈에 띄면 훔치거나 강제로 빼앗는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유발한 사람에게는 신체적 상해를 입혀서라도 그것을 해소하려고 하며 치매 걸린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미 죽고 껍데기만 남은 시체에 불과하다.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주변이 입는 피해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만책을 사용하여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화제가 된 고백 씬에서도 망설임이나 애틋함보다는 대상에 대한 욕망만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만큼 그들이 가진 특징을 고문영을 통해 잘 묘사하였지만 여자 주인공인 만큼 비호감 캐릭터가 될 정도로 선을 넘는 연출은 없다. 그녀가 상해를 입히려고 하는 인간은 시청자에게 명백히 악인으로 인식될만한 인간에 한정되며 또 그녀가 그런식으로 행동할 만큼 가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음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재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사고를 쳐도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의 문제가 된다. 인간과 물건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동일시 하는 그녀의 발언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곧 자폐를 가진 문상태(오정세 분) 통해 문강태(김수현 분)가 가진 편견을 고발한다. 타인이 고문영 자신을 두려워 피하거나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위선자", "겁쟁이"와 같은 말은 오히려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적어도 고문영과 문상태는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감정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그에 반해 문강태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면서 살아간다. 작품 후반에 밝혀지지만 문강태는 어린 시절 잠시나마 형을 죽게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통제하면서 살아간다. 요컨대 자신이 행복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같이 도덕 관념을 따르는 것은 사회적 안전을 상당부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들인 만큼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문강태와 더불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통념과 도덕관념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그곳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인류나 인간 개인의 발전이 어떤 절대적인 선이나 이상적인 미래를 달성해 나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식의 이미지는 우리의 삶을 왜곡한다.

도덕적 이상의 전형적 인간은 소설속에서나 존재한다.

  이상은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을 정당화 하기 마련이다. 공산주의와 같은 이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전쟁범죄들이 옹호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비슷하게 선과 같은 도덕적 이상은 실제의 인간과는 상당부분 동떨어진 그야말로 이상일뿐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통념에 맞추지 못하는 자신이나 선하지 못한 스스로를 보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좋은" 목표들이 오히려 삶에서 역기능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강태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죄의 관념을 만들어내 속죄의 제물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치려고 했다. 고집스럽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문강태를 지켜보면서 평범과 거리가 먼 것은 오히려 문강태였다. 

  생각해보면 형을 핑계로 댔지만 오랜 시간 동안 떠돈 것도 나비에 대한 본인의 공포심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린 것도 본인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형의 독립 가능성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극 중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남주리의 대사는 상징적이다. 드라마는 정확히 문강태가 성장한 만큼만 진행되며 주변인물도 성장하지만 문강태에 비할 바는 못된다. 극의 마지막에 가서 다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형과의 화해를 통해 '죄'가 사해진 순간 그들의 이야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해결법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를 저질렀을 때 언제든지 강태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낄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내안에 있는 이상이 일종의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다. 이 때는 용서에 있어서 형의 존재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

  고문영의 급성장(그래서 애초에 문제가 없었던것 같기도)을 제외하고는 주인공의 성장에 대한 떡밥들과 필요한 요소들을 이 드라마는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다 회수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아까운 부분은 드라마가 빌런의 입을 빌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은 '강자'로 두고 그 이외의 사람들을 '약자'로 표현하는데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그리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이 구도를 받아들여 도덕과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인생을 망친 대표적 인물인 문강태를 지켜보면 그런 이들을 '약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처음부터 '약자'로 태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이 따라온다. 인간의 공감이라는 것은 선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개념인 도덕을 주입받지 않았다면 나를 비롯한 인간은 사이코 패스만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상상으로밖에 진행할 수 없기에 남겨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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