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성찰] 읽기 - 데카르트의 생각도구 챙겨가기

2020. 8. 4. 01:01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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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오늘 다룰 데카르트의 <성찰>은 사실 책을 소개하는 입장임에도 구석 구석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취미로라도 철학의 많은 부분을 엿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제가 엿본 철학의 영역에서는 의아함을 넘어 괴상함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많습니다. 오늘 다루게 될 데카르트도 신 존재 증명과 같은 괴상한 생각을 한 사람 중에 하나 입니다. 그럼 의문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책이면 쓸 데 없이 왜 리뷰하냐?"

  만약 단순히 교양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이었다면 이책은 후순위로 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괴상한 결론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생각 도구와 특정한 태도는 현대인인 우리들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 전반에 대해 논하는 것이 다소 무리라면 저는 최소한  앞으로 다룰 책들에 미친 영향에 있어서는 이 책이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초점은 데카르트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들과 그 논증을 따라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카뮈의 작품에 미친 영향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도 사용가능한 그의 생각 도구만 쏙 빼서 챙겨가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생각 도구를 사용했을 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책의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자와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 봐야 겠죠? 이름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흔하게 근대 철학의 시초, 창시자로 불립니다.

1596년 1650년, 프랑스 출생, 스웨덴 사망

  즉 17세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과학자입니다. 이 시기는 과학이 발흥한 시기였습니다. 그에 걸맞게 동시대의 잘 알려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 중심설이 주류 였던 시대에 태양 중심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법칙을 발견한 케플러, 

역학의 창시자  갈릴레오

  이 때는 구체제와 신흥 학문의 대립이 극에 이르렀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1633년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자신의 이론을 부정한  사건은 유명하죠. 그럼에도 지동설이 천동설을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의 중심이었던 인간의 지위는 과학의 발전으로 점차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망원경이 발전하면서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불신 즉 감각에 대한 불신이 일어났죠. 이는 기존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고 이 즈음하여 사람들이 기존의 권위를 부정한 사상들을 생각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전통적인 사상에 기대거나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갔지만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인 만큼 이런 전통을 모두 부정하고 지식의 근원이 되는 지식을 찾으려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데카르트가 하려던 것은 지저분한 것들을 청소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전도구(학문)를 위한 깨끗하고 반듯한 바닥을 마련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의심 가능한 것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난 뒤 남은 것, 그 깨끗한 바닥, 전제중의 전제, 학문의 토대, 그리고 철학의 제 1명제로서의 발견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 위에서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지식을 쌓아나갈 수 있게 된 겁니다. 증명과정이 없고 결론만 있으니  자아도취적인 이 문장은 아직 여러분에게 묘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문장을 더 잘 음미하기 위해 이제 본격적으로 <성찰>을 같이 읽어볼 건데요. 저와 함께 따라가시면 이 문장에 대한  이해가 보다 분명해 질 겁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 헌사
2. 독자를 위한 서언
3. 여섯성찰의 줄거리
4. 제 1성찰 -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5. 제 2성찰 - 인간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 정신은 신체보다 더 잘알려진다. 
6. 제 4성찰 - 참과 거짓에 관하여 
7. 제 5성찰 - 물질적인 것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 그는 실존한다. 
8. 제 6성찰 -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성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이 중에서 앞의 세 꼭지는 큰 흐름상 생략하고 3에서 6성찰 까지는 신존재 증명이나 신이 선한가? 악한가? 같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논의들이 이어 집니다. 그래서 총 6성찰 중에 알맹이만 쏙 빼면 다음이 남습니다. 

4. 제 1성찰 -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5. 제 2성찰 - 인간정싱의 본성에 관하여 - 정신은 신체보다 더 잘알려진다. 

 

제 1성찰 -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데카르트는 1 성찰 첫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자각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벌써 몇 해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된 것들을 참되다 여겼던가.
(2018, p. 36)

  그리고 이 거짓 위에 쌓아올린 지식과 학문들은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지식을 위해 “한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어 최초의 토대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리라고 여겼던 사실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의심의 대상은  감각 입니다.

  우리는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생생한 꿈을 꾸었던 것을 돌이켜 보면 그 감각이라는 것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로써 확실한 것에서 감각은 제외 됩니다. 그리고 대수학, 기하학 같은 것은 의심할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질문하지만 나를 속이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가 알겠는가? 나도 이렇게 둘과 셋을 더하거나 사각형의 변을 셀 때마다 잘못하도록 그가 만들어 놓았을지.
(2018, p. 40)

  이로써 데카르트는 감각 기관과 더불어 자신의 판단 마저 신뢰할 수 없게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실은 모조리 배제하는 이같은 방식은 다소 과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데카르트의 나름의 고육지책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고 부릅니다. 

 

제 2성찰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 정신은 신체보다 더 잘 알려진다.]

  제 1성찰에서의 고찰에 따라 데카르트는 엄청난 의심에 빠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졌으므로 데카르트는 확실한 것이 나올 때 까지 모두를 거짓된 것으로 취급하기로 합니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의심 속에서도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입니다. 세계가 없고  내가 잘못 생각하도록 속이는 신이 존재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는 속여야 하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는 만들 수 없다. 위와 같은 논리에 따라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확립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식의 토대가 됩니다. 생각하는 한 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성찰 까지 데카르트에게 나라는 것은 생각하는 나,  다시 말해 정신이지 몸을 가진 존재로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결론의 영향으로 인해 데카르트는 자연스럽게 정신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데카르트에게 더 확실한 것은 정신이고 지성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1과 2성찰에서 뽑아본 내용입니다. 앞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사실 데카르트가 이끌어낸 결론과 증명 과정에서의 엄밀함을 따지는 것은 더 이상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회의 하려고 했지만 (1) 철학하는 방식(변증법)을 바꿀 생각은 없었고 (2)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철학적 개념을 의문 없이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한계(사실상 제대로된 방법론적 회의는 니체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생각 도구로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상적인 것들과 알려진 지식들을 모조리 시험대에 올리는 방법론적 회의
  2. 우리가 다루려는 학문과 지식을 명증한 토대 위에서 시작하려는 방식 입니다.

  수많은 일상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인간으로서는 습관대로 사는게 효율적입니다. 우리가 살던 대로(=습관) 살게 되는 이유는 생각의 근본이 되는 토대 생각들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 라는 토대 생각 위에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을 파생할 수 있죠. 이런 생각 토대를 가진 사람은 식인과 전쟁, 인종학살과 같은 생각을 쉽게 더 쉽게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는 토대 생각을 지우거나 교정시키면 전혀 다른 생각들이 파생되어 나오게 되겠죠. 이렇게 전제나 토대를 파악하려는 습관으로 우리는 어떤 논리의 허점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어쩌면 무리에서 벗어난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후대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의 도구들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였습니다. 추후에 이 블로그에서 다루게 될 카뮈도 자신의 작품 <반항하는 사람>에서 부조리를 “출발지점” 그리고 실존에 있어서는 “방법적 회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언급했죠. 대신 카뮈는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모두 제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증한 토대 위에서 지식을 형성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부조리라는 인간 조건(토대) 하에 어떻게 사는 것이 정확한 것인가 입니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설정한 토대 위에 지식을 올려 놓으려고 했고 카뮈는 부조리라라는 토대 위에 인간의 삶을 올려 놓았습니다.   

  카뮈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언젠가 어떤 글에서....


참고 자료
Rene Decartes(1641). 성찰(양진호 역). 서울:책세상(2018).
Sterling Lemprecht(1963). 서양 철학사(김태길 역). 서울: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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