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의 재변주,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 <시지프 신화> [02]

2020. 12. 13. 08:43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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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음 글의 후속 편입니다.

 

왜 나는 삶이 유발하는 부조리에 저항하는가?, <시지프 신화> [01]

**아래 포스팅을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저서, 쉽게 읽기 들어가면서 책 읽기는 이름 없는 낯선 곳에서 자신만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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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부조리한 인간

  이전 장인 <1. 부조리의 추론>까지 카뮈가 선보인 것은 부조리를 토대로 한 "사고방식"을 정의한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이 개개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여전히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죠. 그래서 카뮈는 3장과 4장인 <부조리한 인간/창조>에서 독자에게 몇몇의 인간상과 행위들을 보임으로서 그 구체성을 일부분 확보하려고 합니다. 물론 <부조리의 추론>에서도 상당 부분 힌트가 제공되는 까닭에 이번 글에서는 굳이 파트 구분을 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을 사용하여 부조리한 인간일상적 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카뮈의 부조리 사상이 현실 속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대척점에 일상적 인간을 놓고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모습은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 사람들의 삶일 것입니다.

  일상적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이나 미래나 정당화(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정당화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마치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 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자유란 것이 매번 부인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2016, p. 87)

  일상적 인간은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일상에서 반복해 일어나는 일들에 무감각합니다. 그리고 사회가 직간접적으로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스스로 자유롭다는 착각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주적 시간으로는 찰나의 시간을 살다 가면서도 영원을 살다가는 것처럼 행동하고 삶의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해 신을 만들어 낸 뒤 죽음 뒤의 세상을 더 축복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카뮈에게 있어서 인간들이 동원하는 형이상학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이 부조리라는 거대한 벽에 막혔을 때 동원하는 회피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조리한 인간은 습관에서 깨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삶의 졸음"에서 깨어나 권태를 느끼는 것으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다시 졸음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권태감은 각성에 이르기 위한 선행조건인 것입니다. 일상적 인간이 부조리를 가장 쉽게 인식할 때는 죽음을 생각했을 때입니다. 인간이 삶에 부여한 모든 의미와 가치들은 죽음이라는 블랙홀 안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게 되고 그래서 죽음을 상상해볼수록 부조리의 감정은 더욱더 선명하게 우리 마음속에 드러납니다. 부조리를 삶의 유일한 진실이자 본질로 받아들인 이들은 부조리에 매이게 됩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를 지식의 토대로 세운 것처럼 카뮈는 부조리 위에 인간의 삶을 세워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성찰] 읽기 - 데카르트의 생각도구 챙겨가기

들어가며 오늘 다룰 데카르트의 <성찰>은 사실 책을 소개하는 입장임에도 구석 구석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취미로라도 철학의 많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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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인간은 영원히 그것에 매인다. 희망 없는 인간, 희망 없음을 의식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이 창조자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2016, p. 55)

  이런 부조리를 삶의 조건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때 그 인간은 사회나 신이 부여한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부조리를 인식할 때 타인들이 말하는 신이나 도덕 따위, 이것이 저것보다 좋다는 식의 선호는 부조리의 인간에게 그저 의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견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분명치 않다"라고 느낄 뿐입니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그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맡깁니다. 주변인들은 자유를 얻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 의인으로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의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죄인이라거나 악한 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그에게 '죄'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무죄로 느끼며 단순히 행위에 대한 결과만을 책임지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위버멘쉬 보다 못한 부조리한 인간

  사실 지금까지 묘사된 부조리한 인간은 제가 생각하기에 모순이 없는 영역만을 골라서 소개해 드린 겁니다. 니체 이후의 논의를 진행하고 싶었던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에게 몇 가지 모순을 남겨놓았습니다. 차라리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이 위버멘쉬의 완벽한 복사판이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고려하면 니체와 비교했을 때 카뮈는 삶의 무의미를 그다지 견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카뮈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삼위일체라는 진리를 발견하고 이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본질에 기반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삼위일체에 집착한 나머지 '일상적인 규칙'에 벗어난 자유를 느꼈다면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로서 인간은 그의 세계에 있어서 신의 존재로 등극한 것이고 스스로 신이 된 자는 카뮈가 한 것처럼 더 이상 자살에 대해 논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카뮈는 "삶에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 언제나 어떤 가치 척도, 선택... 선호 태도를 전체로 한다"는 믿음이 부조리에 반하는 믿음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삼위일체를 지탱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라고 "위대"하다며 개인적 감상을 이야기합니다. 이상의 논의는 니체의 다음 주장으로 갈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판단이 오류라 해서 우리가 이 판단을 반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공상적 세계를 기준으로 해서 현실을 규정하지 않고는, 수를 통해 세계를 위조하지 않고는 인간은 살 수 없다.
(2020, p. 19)

목차
1. 부조리의 추론 

2. 부조리한 인간
참고자료
Camus, A.(1942). 시지프 신화(김화영 역). 서울: 민음사(2016) 
Friedrich Nietzsche(1886). 선악을 넘어서(강두식 역). 서울:동서문화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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